바람으로부터

 

김미란 개인전

Kim  Mi - Ran

 

2015. 10. 23 - 11. 08

opening  10. 24  pm. 5 

바람으로부터 _  marbling on pvc _ 400x280cm _ 2015

흐르는, 물 1, 2(좌,우)  _  볼펜, 캔버스  _  97x130cm(each)  _  2013-15 

 

 

 

어느 계절의 어느 날. 바람이 불었다. 유난히 거칠게, 부딪치는 이것저것들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의지 약한 것 들은 스스로를 놓아 나뒹굴고 있었다. 

나. 내가 들어앉은 이 안은 그 흔들어댐에서 자유롭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다면 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의지가 강하지 않아도 괜찮고, 막아낼 힘이 없어도 괜찮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다면. 

  

흔들린다. 여기서 나가지 않았는데도. 

  

변명: 흔들림과 이미지, 흔들림의 이미지. 

바람이 흔드는 것은 머리카락이나, 몸뚱이가 아니라 그 안쪽의 무엇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실체가 없는 것은 무한한 자유이거나 두려움이다.

 일단 같이 흔들려 천천히 움직인다.

시작도 끝도 중간도 확신은 어디에도 없듯, 뚜렷한 형상도 없다. 

이동만이 있다. 실체 없는 것에 흔들리는 실체 없는 흔들림은 현상을 형상화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어 진행 한다.

 형상이라고 해서 명확한 무언가 이지 않을 수 있듯이 무엇이 되지 않고 그 언저리로 스친다.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엉키고 

엉키고 또 엉켜서 

도무지 풀 엄두도 안 나던 덩어리가 흐르는 물에, 

지나는 바람에, 구르는 돌에 

얽힌다.

흐르는, 물 2  _  볼펜, 캔버스  _  97x130cm(세부)  _  2013-15    

하얀 표면에 선을 긋는 순간은 숨을 쉬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오염된 공기도 여과 없이 들이 마시는 것처럼, 밖으로 부터의 자극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번 그은 자리는 지울 수 없고 지나온 시간은 사라질 수 없으며, 

지겨운 시간이 흘러 무뎌진 몸의 고통이 더딘 채워짐이 되어갈 때,

 내 속처럼 펜의 속도 비어간다. 비어있는 곳에는 바람이 분다.

 남겨진 그림의 여백에도, 남겨진 생의 시간에도 바람이 분다. 

 /작가노트_ 김미란

 나-無 _ 먹, 한지 _ 41 x 61cm  _ 2015(세부)

나-뒹구는 _ 32x41cm(each) _ 2015

흐르는, 섬 _ 먹, 한지 _ 45x73cm _ 2015

 

 

 

서랍에 담긴 시간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마지막 사랑, 마지막 만남, 마지막 시간…….

마지막 전시를 생각하니 등에 땀이 맺힙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지금의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아빠의 작은 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용도를 잊은 물건들이 오랜 시간 들어 있습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마지막을 만나지 못하고,

그렇게 마지막이 될 것들입니다.

  

엄마의 서랍을 열어보았습니다.

옷을 뜨고 남은 나머지 실 뭉치들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풀고 다시 뜨고, 무엇이 될 준비를 하고,

그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꺽은 가지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싸 봅니다.

  

바람이 

날리는 실 한 올에 바람望을 담아 봅니다.

                                                                                             서랍에 담긴 시간 _ 가변설치 _ 2015

 

 

 

<바람으로부터>

    

 

바람에 대한 이야기다. 바람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기에 바람만을 얘기한다. 

이 모든 것이 바람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바람이 지나갔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나긋나긋한 바람마저도 제 옆에 지나가는 것이 산이었는지 새의 깃털이었는지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였다고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인고한 가을나무에 몸 붙인 나뭇잎을 흐트러지게 남겨두고도 엉겨지는 것이 너였는지 나였는지 변명할 줄도 모른다. 정신없는 광란에서도 바람에게 너스레는 없다.

  

김미란 작가의 펜/먹 드로잉은 동일하지 않은 작은 점과 원들이 엉키고 퍼지며 흐르는 모습으로 혹은 흐르고 퍼져서 엉킨 물이며 몸이고, 섬이며 바위다. 물에도 몸에도 섬에도 바위에도 전시제목 [바람으로부터]와는 다르게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팽팽하지 않은 점들의 구성과 작은 원들의 집합체가 의식적이지 않은 흐름으로 바람과 닮아 있다. 어쩌면 이미 바람이 길들이지 못하는 ‘무언가’였으므로 애써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슬픔에 차보이거나 몸부림을 치지 않는다. 

또한 작업제목에서 보면, <흐르는, 물>, <퍼지는, 몸>, <엉키고 엉켜서, 돌>등과 같이 ‘흐르는 물’, ‘퍼지는 몸’, ‘엉키고 엉켜서 돌’이라 하지 않는다. 형상을 빗대어 이름을 지을 때의 찰나에 숙고가 있다. 흐르는 물은 자기가 흘러야 하는 곳이 맞는지 엉키고 엉켜진 돌 또한 스스로가 엉켜진 것인지 확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움직임의 형상이 어떠한들 스스로의 명대로 여전히 실존하는 듯하다. 

  

그러나 작업 안에서 ‘나’는 다르다. 바람에 흔들려서 견디다 못해 몸체에서 나가떨어진 것 같은 돌, 바위, 나뭇가지, 나무토막 드로잉 <나-뒹구는>과 불이 난 듯싶은 나무 모습의 <나-無>는 냉소함을 잃었다. 형상도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으며, <나-無>는 다른 드로잉과는 다르게 화면이 전체적으로 점들로 채워져 있다. 섬, 바위들이 바람에 애초에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라면, ‘나’도 바람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 

  

김미란 작가의 펜/먹 드로잉은 펜의 생명이 드로잉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곳에 작가가 있다. 생명이 옮겨지는 과정은 흔적으로 미끄러진다. 바람은 빈 곳만을 옮겨가며 생명=삶을 뒤쫓아 간다. 펜의 생명이 화면으로 점차 옮겨지면서 생명은 죽음으로 몰락된다. 작가가 이루던 지루한 시간도 몸의 묵상으로 퍼지지면서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인다. 그러다 작가는 바람을 잡아서 길들인다. 생명을 부여받은 화면도 모두 채워지면, 삶이 모두 채워지기에 작가는 더 이상 그리기를 멈춘다. 

이는 전시장 바닥에 일정한 높이로 잉크물감으로 마블링을 얹은 PVC조각들로 설치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획된 직사각형의 터전에 판판하게 놓인 설치물 사이로 지나간 자국/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자국이 바람의 흔적이며, 동시에 바람의 균열이다.

  

그리고 서랍 안에서 바람이 분다. <서랍에 담긴 시간>은 김미란 작가의 부모님들의 사용하셨던 물건으로 채웠다. 아버지가 더 이상 읽지 않으시는 책들과 아버지의 책상서랍 안에서 보관되었던 붕대, 청진기 그리고 어머니의 서랍 안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옷이 되었던 털실, 다시 아버지의 옷이 되어줄 털실들이 부모님의 서랍 안에서 이곳으로 작가는 옮겼다.

  

바람이 곧 지나갈 것이다. 

바람은 지나갈 시간을 확인하며, 뒤엉킬 준비를 한다.

진정이 되면, 바람이 다른 바람의 옷을 벗겨버릴 것이다.

같은 시간에 다른 바람이 선택한 것은 ‘극복’과 ‘바람望’이다.

(강수경/예술공간 세이 전시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