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성스러움="성스러움">이라는 대립적인 두개의 단어로 메시지를 던지는 주제로 레스보스섬의 시리아 난민의 긴 행렬과 한국 전쟁이 낳은 기이하지만 친밀한 풍경,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 등을 다섯 명의 작가의 작품으로 제시한다. 
 

전시타이틀 : <폭력과 성스러움="성스러움">
참여작가 : 김지원,이승훈, 임안나,조진섭, 차경희
전시기간 : 11월11일~ 11월 20일

임안나

Frozen Hero 시리즈 


전쟁을 상기하기에 가장 쉬운 매개물은 전쟁에 사용되었거나 
그것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무기들의 형상이다. 
나는 공공의 전쟁기억을 위해 폐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다양한 풍경들을 찾아 촬영하였다. 
평화를 수호하는 목적이 동반되어 있었을 이 행위들은 
기념관, 공원, 행사장, 그리고 잉여의 공간에서 
전쟁과 분단국가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다채롭게 재현하고 있다.

내가 바라 본 일상적일 수 없는 기능성으로 
거대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차갑게 박제된 전쟁 오브제들은 
주변 자연환경과 병치되고 중첩되어 낯선 장면들을 주도한다. 
영웅, 피해자, 가해자, 사람이 사라져버린 전쟁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저 차가운 금속의 오브제들로 전환되어진 신화가 두렵다.


차경희

두 개의 얼굴, 멜랑콜리
두 얼굴의 공간을 가진 도시는 화려하고 매우 분주하지만, 
동시에 외롭고 고독한 공간이다. 도시인의 얼굴 또한 두 얼굴이다.
도시인의 내면은 욕망을 분출하지만 동시에 욕망의 감금 공간이기도 하다. 
이 두 얼굴의 사이에서 멜랑콜리의 얼굴들이 태어난다. 
멜랑콜리, 그것은 대도시의 욕망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내면풍경이다. 
나의 사진들은 이 멜랑콜리의 얼굴들을 두 개의 프레임 공간 안에 담으려 하였다. 
<푸른 방="방">으로 엮은 젊은 여성의 초상과, 
<명상원>안에서 마음수련을 하는 모습을 담은 얼굴들. 

<푸른 방="방">의 밀실 안에서 펼쳐지는 초상을 통해서는 
욕망 충동과 그 욕망의 고독함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명상원>에서는 욕망을 방어하고 통제하려는 애씀과 그 쓸쓸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재현의 공간은 달라도 오늘날 도시인들이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욕망과 열정, 
그리고 멜랑콜리의 얼굴들을 보여주면서, 
두 공간을 통해 멜랑콜리에 대한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이승훈

Moving days - 분갈이 하는 생

어릴 적 살던 곳에 세간들을 옮겨 놓고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한 번의 작은 이사를 치르는 셈이다. 
직접 끌거나 짊어지고 가기 때문에 옮기는 길에 물건들이 상하기도 한다. 
이사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처럼.

늘씬하고 잎이 크던 알로카시아는 옮기는 과정에서 잎이 찢어지고 상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잎이 크게 자라지도, 줄기가 높이 뻗지도 못했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집에서 기르던 화분들에 새삼 눈이 가게 되었다. 
몸이 자라는 만큼 때에 따라 이 화분에서 저 화분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마치 이리저리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의 생과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몇 주 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번이 제발 마지막 이사가 되기를 바라는 
한결같고도 부질없는 바람으로 또 한 번의 이사를 했다.

그렇게 치른 또 한 번의 급한 이사 탓인지 
기르던 대부분의 화초가 시름시름 앓고 있다. 



김지원

<the hair="Hair" of="of" the="the" artist="Artist">
<one of="of" the="the" most="most">

‘언젠가 내가 박물관에 있는 프락시텔레스의 비너스 상 뒤에 
연필로 내 이름을 적었다고 말한 적 있지. 그건 욕망이 아닌가?’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진실의 광채라고 말했어. 무슨 대단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진실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서로 가깝단 말이지. 진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가장 만족스러운 관계로 충족된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거야.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것들 사이의 가장 만족스러운 관계로 충족된 상상력에 의해 
파악되는 거고. 진리에 이르는 첫 단계는 지성 자체의 틀과 범위를 이해하는 것, 
즉 지성의 작용 자체를 이해하는 거야. … 
아름다움으로 가는 첫 단계는 상상력의 틀과 범위를 이해하는 것, 
미적 인식의 작용 자체를 이해하는 거야. 알겠어?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에서 

무명의 예술가 지망생에게 서양미술사 책에서나 보던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들은 쉽게 진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성역과도 같았다. 그곳에 나의 머리카락 한 올로 흔적을 남기고 무단으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the hair="Hair" of="of" the="the" artist="Artist"> 시리즈이다. <one of="of" the="the" most="most">는 내가 방문했던 미술관의 홈페이지들에서 미술관 소개 및 비전 선언문들을 수집한 뒤, ‘one of the most’ 라는 미술관의 자기 가치 평가를 엿볼 수 있는 구문들에 밑줄을 그은 텍스트 작업이다. 



조진섭

New Life


우리는 희생물을 찾는다. 그리고 내가 죽이지 않고 타인의 손을 써서 죽인다. 
그리고 우리는 정당성을 갖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많은 전쟁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가 나온다. 그러나 우린 아직 분개하지 않는다. 
그들이 희생당하면 그때 비로소 분개한다. 그리고 우린 정의의 사도가 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폭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우리의 폭력은 성스러움으로 둔갑한다. 
터키 해변에 시리아 아이의 사체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희생물의 희생을 방관하는 방관자이다. 그리고 그 방관은 암묵적 강요다. 
타인의 희생에 우리는 관대하다. 그리고 점점 우리는 고립되어 간다. 
인터넷이 발달 된 사회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희생물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희생의 차례는 내가 될 것이다. 
운 좋게 제 3의 희생물이 등장한다면 폭력은 나를 비켜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운 나쁘게 당신이 제 3의 희생물이 될지도 모른다.

“인류 문화의 모든 것을 ‘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희생은 인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말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시각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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